서랍속_작은글

너를 중심으로 세상이 느려진다 이건 얼핏 들었던 물리학 이론이 아니다 시인과 작가들이 써내려갈 표현도 아니다 굳이 정의하자면 심리학에 가깝다고나 할까 사랑 우리가 예상치 못하는 모든 기적을 뒷받치는 이름

유한해서 아름다운 것들이 좋아. 발끝에 닿는 파도, 길가의 코스모스, 새벽녘의 도시, 고운 단어들, 노래들, 색깔들, 사람들. 만약 유한한 것이 수명뿐이라면 난 슬퍼할 거야. 아름다운 것들을 두고 혼자 져버린다는 사실에. 

돌아가면 맞아 주시려나요. 얼굴엔 해사한 웃음 가득 띄우고 두 팔을 벌린 채 안아 주시려나요. 지금까지 들었던 것 중 가장 고운 말로 안에 들이시려나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네요.

넌 나와 나눈 짧은 대화를 타고 나한테 들어왔지 호흡기 전체를 휘감고 모든 혈관과 근육과 신경과 뼈 사이사이까지 나는 네게 젖었고 이젠 돌이킬 수도 없어 심장과 뇌마저 모두 잠식되었거든 물 젖은 솜마냥 무거워 머리인지 마음인지 모를 어딘가가 

그래 잠깐 돌아봐주면 안 될까 이쪽으로 인사해주면 안 될까 속에서부터 녹아가고 있는 얼음이 이곳에 있으니. 

모든 정을 놓고 떠나왔기에 미련 없이 살았지. 훗날 밤마다 기억을 되새길 줄 꿈에도 모른 채. 뒤섞인 추억이지만 나는 그것들을 정확히 분류해낼 수 있어. 

초겨울

구름 없는 하늘이 그 색만큼 시리게 다가오는 날들이 좋다. 머리 위엔 선명함만 남아 언젠가 쏟아질 하얀 것이 그립지도 않게 한다. 맑게 위장한 그 속은 차가움을 알고 있지만 어쩌랴. 그 기가 막힌 위장 덕에 속까지 들어가보게 되는데.

아가, 바다로 가. 네가 사랑한 바람을 따라서. 작은 시냇물소리에 귀를 기울여. 물은 반드시 바다로 흘러가게 되어 있으니. 오, 아니요. 저는 못하겠어요. 바람이 어디로 부는지도 알 수 없는걸요. 시냇물은 쓰레기로 막히고 메말라서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아요. 물이 과연 바다로 흘러가나요?

저 그림을 덮자 온전히 덮어버리자 검은 천을 준비해 조명을 가리고 캔버스를 없애자 조명을 가릴 수 없어 그러니 흩어버리자 천 사이사이에 빛나는 점들은 조각나버린 빛의 잔해야 그러고도 남은 조명은 그냥 은은하게 두는 거야 걱정 마 얼마 지나지 않아 천을 치울 거니까

사랑받으려 애썼어요 온갖 아부 다 떨고 그 마음에 들려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나요 아 정말 근데 이젠 사랑받지 않고도 조금씩 살아가게 되네요 몇 년을 아프고 또 몇 년을 기뻐할 수 있을까요 아니 기쁘긴 한 걸까요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아 사랑하려고 노력하지 않아 귀찮아

그대 고개를 조금만 들어요. 나에게로 손을 뻗어요. 아니면 내가 그곳으로 갈까요. 내가 어떻게 그대를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그대가 나를 아는지도 모르지만. 기다려요. 억겁의 시간이 지나 우리는 만날 거고, 사랑할 거에요.

그 해 네 목소리가 말이 행동이 맞잡은 손이 그리고 네가 얼마나 따스했는지 몰라 내가 녹아내릴 것만 같았단다 나는 녹아서 너의 바다가 되고 너는 나의 햇살이 되는 걸 꿈꿨지 그런데 왜 왜 녹아버렸어 알잖아 네가 따듯한 바다가 되면 나는 뭘 하라고 거기서 살 수나 있을까